저마다의 여행에는 ‘기둥의 순간’이 있다

『되는 대로 낭만적인: 스물여섯, 그림으로 남긴 207일의 세계여행』

황찬주 지음

by 일이🐬🍀

여행은 무엇으로 기억될까요? 냉장고에 붙은 기념품 자석? 클라우드를 가득 채운 사진? 보딩패스? 노트에 끼적인 일기? 

여행은 때로 맛있는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가져온, 식당 로고가 박힌 냅킨으로 남기도 하고, 까만 하늘을 나는 중에 제공되는 기내식의 향기로 기억되기도 하고, 박물관의 팸플릿이나 글자가 지워져 가는 편의점 영수증,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반도네온 선율(그는 저에게 연주하던 한 손을 내밀어 관람료를 요구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로도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멋진 선물 같은 표지를 두르고 있는 황찬주 작가의 에세이 『되는 대로 낭만적인』을 펼치면 글 사이사이 약 70여 개의 그림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작가가 무려 플러스펜으로, 여행을 하던 중에 발이 멈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 것인데요. 

이 책에는 스물여섯 살, 업의 세계로 뛰어들기 전에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하고자 207일의 여행을 떠난 청년의 ‘되는 대로 낭만적인’ 여행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좋아하는 건축가의 건축물을 보겠다고 서울에서 수원 화성까지 거리를 무작정 자전거 타고 달려본다거나(구글맵에 속아 얼마나 먼지 모르셨다고 하네요. 죽을 뻔하셨다고), 현지에서 여행객끼리 무작정 어울려 인생 첫 문신을 새기기도 하고(한 친구는 크리스천이 아닌데 술김에 십자가를 새겼고요), 버스비를 아끼고자 세 번의 히치하이킹을 하며 ‘로컬한’ 기분도 맛보고요. 

이 책의 제목은 이런 삶의 ‘랜덤한’ 낭만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계획된 낭만이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의 낭만은 우연한 순간에 탄생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볼리비아 수크레에서 트럭 파업을 만나 나흘동안 마을에 갇혀 있다가,

차 벽을 뚫고 트레킹을 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Ep. 47).

여행의 어떤 순간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장면이 내면의 갈고리에 우연하게 걸려들 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제목에서 여행은 ‘기둥’으로 기억되기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되는 대로 낭만적인』의 206쪽에는 기둥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박물관에서, 정작 내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다름 아닌 입구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다시 입구로 나왔을 때, 기둥은 비스듬한 오후 4시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커다란 아이보리 대리석 기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홈이 파였고, 주춧돌의 유려한 곡선을 따라 날카롭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빛을 받은 부분은 상아색과 백색의 중간에서 반질반질 고급스럽게 빛난다.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보다도 매력적인 빛깔이었다. … 이유를 생각할 새도 없이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그대로 출입구 앞 바닥에 앉았다. 행여 기둥을 비치는 햇빛이 사라져버릴까 허둥지둥 연필을 꺼냈다.” (p.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