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노카제(海士の風)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완도쯤 되는 작은 섬에 세워진 출판사입니다.
이곳에서 2021년 첫 출간된 책이, 다치카와 에이스케의 《진화사고》입니다.
출간되자마자 아마존재팬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일본 사회학자, 경제학자가 모여 선정하는 〈야마모토 사치에이〉 상을 수상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책을 '작은 출판사가 일으킨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책의 아이디어는 이렇습니다.
"수십억 년 동안 생물이 생존하며 터득한 진화의 원리를 활용하면 누구나 살아남는 콘셉트를 만들 수 있다."
저자는 일본의 떠오르는 혁신 아이콘으로 불리는 다치카와 에이스케입니다.
2025년 오사카 엑스포 크리에이터, 쿨 재팬 콘셉트 디렉터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젊은 디자이너죠. 지금까지 받은 디자인 상만 해도 100여 개가 넘습니다.
진화론을 활용해 누구나 무한대로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흐름'에서 출간하기로 결정했죠.
책은 진화론의 핵심이론인 변이와 선택을 통해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방법을 상세하게 소개합니다. 덤으로 상상력을 불러내는 멋진 도판이 한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편집하면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 보셨나요?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한 여자가 서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저자가 2014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 출품한 설치 미술입니다.
작품명은 〈SPACE SPACE〉. 우주에서 아시아를 바라본 시선을 형상화했습니다.
2014년, 요코하마가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되면서 한중일 문화 교류 전시회인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가 열립니다. 당시는 영토 문제, 반일 운동 등으로 한중일 간에 긴장감이 높던 시기였습니다.
저자는 국가 간의 갈등을 넘어 하나의 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 볼 수 없을까 고민했대요. 그때 떠오른 문장이 일본 최초의 우주 비행사 모리 마모루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남긴 한마디였습니다.
“우주에서는 국경선이 보이지 않는다.”
모리 마모루의 말에 영감을 얻어 아시아를 200만 분의 1 크기로 축소해 3000미터 상공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듭니다.
각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은 눈부신 빛으로 이어진 하나의 아시아를 보면서 문화로 분단이 해소되는 듯한 희망을 느꼈다고 합니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한일 정상 간의 대화를 두고도 찬반이 뜨겁습니다. 이 뉴스레터가 발간될 쯤이면 IAEA의 원전방류 보고서가 발표됐겠네요. 이제와서 이 논쟁에 뛰어들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일본을 싫어합니다. 일본 정치인의 시대착오적 망언이나 지식인들의 혐한 발언을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어집니다. 몇 해 전 도쿄의 대형 서점을 찾았다가 평대에 한가득 놓인 혐한 서적들을 보고 기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본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일본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입니다. 건담과 은하영웅전설로 정치의 비정함과 전쟁의 무서움을 배웠고, 일본 드라마와 게임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됐죠 ㅡㅡ; 올해는 초등학교 5학년 딸과 오사카의 덴덴타운을 돌아다니며 피규어 보는 재미를 나눴습니다. X세대인 저에게 일본은 우리에게 없던 자유의 상징 같은 곳이었습니다.
일본은 그래서 저에겐 양가적 대상입니다. 아마 다치카와 에이스케도 같은 고민을 했던가 봅니다. "서로 이해하며 살 수 없을까?" 하고요.
저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다치카와 에이스케는 일본인이지만 아버지가 재혼한 분이 한국인이었다고 해요. 어린 시절 김밥, 꼬리곰탕, 부대찌개를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진화사고> 한국어판 서문에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밝힙니다.
온갖 것들과 부대끼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듯 세상을 보라는 것은 사치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깊어질수록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여유를 두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조금은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요?
《진화사고》에서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창의적 방법으로 양국 간의 문제가 해결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p.s 딸은 오사카를 갔으니 이제 도쿄를 가자고 조릅니다. 부디 우리 딸에게는 일본이 오염수나 방류하는 불편한 이웃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