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마케팅 일정이 모두 마감됐고, 당장 책을 며칠 후에 찍어야 하는데 표지를 바꾸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거기에다가 미드저니로 만든 AI 그림을 쓰라니 이걸 어째. 아니 저 그림 자체가 디자인 의도와 전혀 맞지 않아. 당최 어떻게 표지에 쓰라는 거야. 계약서에도 없는 요구를 왜 해. 아니 맘에 안들면 미리 이야기라도 하던가. 어쩌라고 나더러.’
투덜투덜 말들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는 없고 앞이 노래졌습니다. 그래도 일은 해야죠.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한 잔 위장에 때려 박고, 주저리주저리 표지 수정이 불가한 이유와 현재 상황을 ‘우리말’로 썼습니다.
이걸 영문으로 바꿔서 보내야 할 텐데. 영어만 보면 심약해지는 저로선 불가능한 난이도.
예전 같으면 영자 신문 기자 친구(윤미야. 너밖에 없다. 교회 열심히 다닐게), 친한 번역자(두완 씨, 나 좀 살려. 내가 요즘 연락이 뜸했지)를 찾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습니다.
인공지능 번역기 deepl에 글을 넣고 돌립니다. 번역이 이상하다 싶은 부분은 deepl이 알아먹을 수 있게 원문을 몇 번 손본 끝에(이럴 땐 인공지능이 갑입니다. 굽어 통촉하여주소서)... 30분 만에 완성.
저자에게 메일 보냈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이틀이 지나고 답신이 도착.
저자분도 IT 전문가 아니랄까봐 영문 메일과 함께 deepl로 변환한 한글 번역본도 첨가했더군요.
“한국 출판사가 의도했던 대로 진행하세요. 제 아이가 요즘 한국음악을 자주 듣습니다. 저도 한국 기업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요. 그래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좋은 책 바랍니다.”
이게 다 BTS 때문이라고 웃으며 다행히 책을 마감했습니다. 퇴근 길에 좋아하는 꼬칫집에 들러 생맥을 주문하고 한 잔을 거의 비울 때쯤. 갑자기 심한 현타가 몰려오더군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림 하나 그릴 줄 모르는 저자가 인공지능으로 5분 만에 책에 쓸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서로의 언어도 모르는 저자와 편집자가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부터 자료조사와 편집에 챗GPT와 바드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편집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교정 또한 더 이상 빨간펜을 들지 않습니다. 갤럭시탭에 PDF를 띄워놓고, 펜으로 지웠다 썼다를 합니다. 아날로그 편집 일에 저도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과 IT가 깊숙이 들어와 있던 거죠.
그.런.데. 그 모든 일의 결과물이 종.이.책.이라니.
뭔가 뒷맛이 씁쓸했습니다.
종이책을 계속 내는 것이 맞나? 출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아니 20년 차 편집자의 밥벌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피드백을 남겨주세요↩︎)
생맥주 한 잔이 소주로 바뀌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아직 보도자료를 쓰지 못 했어요. 챗GPT가 써줄 수 있나 내일 좀 물어봐야 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