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에게는 유독 마음이 가고 얼른 편집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지난해 저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울대병원에서 38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오은경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도서를 계약하면 일명 ‘가제’가 붙습니다. 사실 임시로 붙은 이 가제야말로 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훗날 『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가 되는 오은경 선생님 책의 가제는 ‘죽음으로 배우는 삶’이었습니다.
저에게 죽음은 언제나 극복 불가능한 것, 슬픈 것, 어두운 것, 하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대상이었습니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쉽게 짓눌렸고, 부고 소식은 무거웠으며, 장례식장에서 어떤 자세와 표정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어려웠습니다. 제 말을 가만히 듣던 오은경 선생님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참 무서워해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애도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소화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그 말에 이 책의 필요를 느꼈습니다. 당장 저에게 필요한 책이라면 독자들에게도 필요한 책일 테니까요.
본격적인 원고 작업이 시작되고, 최종 원고로 가기까지 저는 선생님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생각하고 있던 방향이 달라 조율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타깃 독자 선정), 덜어낼 부분과 추가해야 할 부분도 매일 이메일+전화+카톡+문자를 오가며 의논했는데요(선생님, 이 부분은 빼는 게 나을 듯하고 이 부분은 조금 더 설명해 주시면...). 이 과정에서 1300매에 이르던 원고가 700매가 되었습니다. '반이나 사라졌다면 안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편집자마다 성향이 다르지만, 제 경우에는 최대한 많은 초기 원고가 있어야 최적의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덜어냄의 미학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행히 선생님께서 제 생각을 수용해 주셔서 저도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네요.
이 책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죽음을 통해 배우는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기한 것이 저도 선생님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배우고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거예요(그것이 책의 힘). 그 동안 수동적으로 바라봤던 죽음을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되었고, 죽음의 수많은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단 하나만 꼽아보자면, 말만 들었던 '연명의료'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명의료는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임종기 환자의 임종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생의 가능성이 있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소생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연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2018년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입니다. 사전에 연명의료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죠.
출처: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2025년, 아직 저는 올해를 어떻게 보낼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정해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이에요. 저는 올해, 제 죽음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고 이에 관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음을 직면하고 제 안의 두려움을 없애보려 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더 잘 이별하기 위해서요.
이 책은 서울대병원에서 38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저자가 응급실, 행려병동, 가정간호 등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죽음을 사유합니다. 간호사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와 그 가족들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직업인데요. 셀 수 없이 많은 삶과 죽음이 스쳐지나가는 동안 저자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로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무방비한 상태로 죽음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할 필연적인 과정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요인으로 죽음을 외면합니다(저 또한). 논의 자체를 꺼리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남’, ‘이별’과 같은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해 표현함으로써 직면하기를 피해요. 이유는 간단하죠. 현대 사회가 죽음을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효율성과 생산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노화나 죽음을 ‘비생산적’인 과정으로 바라보아 우리가 논의할 주제에서 소외시킵니다. 하지만 죽음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니 만큼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더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좋은 죽음은 삶을 더 좋은 쪽으로 이끕니다. 『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는 저자의 임상 경험을 통해 웰 다잉을 넘어 웰 리빙으로 가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더 잘 이별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죽음을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