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생명의 지문 그리고 몽골 여행기
🌊 11월 둘째 주 흐름레터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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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마음이 차갑게 식고 있는 독자분들께
편집자C😎의 "피" 이야기,
그리고 10월에 미리 맞고 온 몽골에서의 "첫눈" 이야기를
연이어🙄 전해드립니다.
(2배속 속독,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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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이지만 과학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묻는다
『피, 생명의 지문:
생명, 존재의 시원,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피 이야기』
라인하르트 프리들, 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배명자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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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지금도, 매일 아침, 집이 비고, 모든 이웃들이 일하러 나가면 나는 다른 것을, 그러니까 청소를 하거나 어제 저녁 식사의 설거지를 하거나,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고 세탁물을 다리거나, 잼이나 케이크를 만드는 대신 식탁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신문을 읽는 것에 가책을 조금 느낀다."
헝가리 출신의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이 읽기 중독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 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네 살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로 이번 레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으면 출판 불황은 없을 텐데, 성인 한 명당 1년에 구매하는 책의 평균 수량이 3권이 채 안 되는 시대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든 책이 조금은 더 팔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이지, 책이 팔리지 않습니다. 내가 책을 못 만드는 건가, 하는 자책으로 자다가 이불킥을 할 정도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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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생명의 지문』은 독일의 저명한 심장외과 의사 라인하르트 프리들 박사의 책입니다. 심장외과 의사는 말 그대로 심장을 다루는 의사입니다.
모든 장기가 그렇지만, 그럼에도 심장은 특별하죠.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무엇일까 떠올리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장을 연상하듯 말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심장은 우리 몸에 흐르는 모든 피가 모이는 공간입니다. 피는 심장에서 퍼져나가 온 몸을 관통한 뒤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죠. 피의 고향인 셈입니다. 심장을 다루는 심장외과 의사에게 피가 끊어내지 못하는 동반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의 스펙트럼은 꽤 넓습니다. 의학책이면서 과학책이고, 경제와 문화, 의식과 심리의 영역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2024년 독일 최고의 과학책 최종 후보작이기도 했던 이 책은, 우리가 왜 피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피가 과거 우리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쳐 왔으며, 지금 어떻게 끼치고 있는지, 그리고 미래에 피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피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을 쌓고 싶은 독자분께 이 책을 자신 있게 권해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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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담당 편집자로서 이 자리를 통해 이 책의 다른 면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제가 이 책을 더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심장에 칼이 찔려, 칼자루만 밖에서 볼 수 있는 상태의 남자가 응급실에 실려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상상을 해보세요. 심장의 박동에 맞춰 칼자루가 움찔거리고 있습니다. 끔찍하면서도 놀라울 수밖에요.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스포일러입니다만) 이 남자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는 겁니다. 이 남자의 치료와 관련한 이야기는 책 전반을 통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왜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남자의 이야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한 난민입니다. 아버지는 죽었고, 형과 어머니와 함께 탈출했던 이 남자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독일에 도착합니다. 독일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죠. 평범하고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녀는 독일 여인이죠. 남자는 연인의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갑니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연인의 아버지가 그를 칼로 찌르죠.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인이라는 것! 이방인이라는 것!
"순혈"이라는 말을 알고 있으시죠?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 순혈에 대한 집착이 자아낸 비극의 순간들을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에 의해 발발한 세계 제2차 대전이죠. 하지만 이러한 비극은 남자의 사례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죠.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라인하르트 프리들 박사는 "피"를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지, 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공정한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피는 생명을 살리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생명을 배척할 명분도 됩니다. 하지만 의사에게 피는, 누구의 피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피는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의 끝입니다. 그것만이 모든 생명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악용하는 건 스스로 고귀한 생명체라는 자부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프리들 박사는 말합니다.
우리의 피는 차가울까요, 뜨거울까요?
대답하지 마세요.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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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생명의 지문』
라인하르트 프리들, 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배명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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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날, 저는 울란바토르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2021년에 개항한 이 공항은 말 그대로 거대한 평원에 덩그러니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항을 빠져 나왔을 때 미지의 행성에 착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악몽을 연달아 꾸는 것처럼 불안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공항에서 울란바토르로 가는 길은 멀었습니다. 운전하시는 분이 말씀하시더군요.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길은 엄청 막히기 때문에 조금은 돌아가겠다고. 거리는 좀 더 멀지만 시간은 덜 걸린다고. 차 멀미가 있는 제게는 너무나 사려 깊고 반가운 말이었습니다. 2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10분 정도를 단축하셨더라고요. (아니, 슨생님! 😱) 그러니까, 몽골에 대한 첫인상은, 네, 그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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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몽골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4박 5일의 여정이었지만, 한 일도 많고, 돌아다닌 곳도 많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단기기억들은 바로바로 치워버리는 제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모든 시간들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했던 어떤 여행보다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면의 한계도 있고, 또 제 개인적 체험이다 보니 공감의 포인트도 살짝 다를 수 있겠다 싶은 걱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짧게 첫눈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첫눈 오는 날, 함께 눈 맞은 사람들 이야기죠.
몽골에서의 3일째 되던 날, 새벽 5시에 호텔을 나섰습니다.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죠. (축복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저희는 총 여덟 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간 고고학자와 그의 조교, 저, 그리고 몽골의 고고학자와 미국, 러시아, 캐나다에서 모인 고고학자들이었죠.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은 울란바토르를 빠져 나와 그 언젠가의 징기스칸처럼 거침 없이 북쪽으로 내달렸습니다. (가자, 진격이다!)
두 시간쯤 달렸을까요? 저희는 잠시 슈퍼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뭘 이렇게 많이 사지?' 싶을 정도로 먹을 걸 싹쓸이 하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한, 30분쯤 지났을까요? 길이 사라졌습니다. 기사분이 덤덤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여기서부터는 길이 없습니다. 찾아서 가야 해."
찾아서 간다? 무슨 소리일까? 🙄
저는 머지 않아, 왜 차가 랜드로버인지도, 쇼크업쇼버가 왜 그렇게 키다리처럼 올라가 있었는지, 왜 50킬로미터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면서 안전벨트를 반드시 하라고 강조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기사분은 기억에 의존해 차를 몰았습니다. 이따금 옆자리에서 "여기가 맞나" 하는 혼잣말도 하시더군요.(물론 통역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차는 초원을 가로질렀고, 산을 넘었고, 강을 건넜습니다. 온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음에도 관절인형처럼 팔, 다리, 목이 따로 놀았죠. 그런 상태로 한참을 가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람들, 사실은 사기꾼들이 아닐까, 오지 어딘가로 나를 팔려는 걸까?'
구글맵에서 제 위치를 확인해봤는데, 지도조차 뜨질 않더군요. 통화 불능! 신호가 사라진 건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화면이었습니다. S의 얼굴이 한참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제 걱정 같은 건 초원에 싸놓은 염소똥처럼 여기며 랜드로버는 나아갔습니다. 이제는 폭설로 변해버린 초원을, 거침없이, 굉음을 부르짖으며. (가자, 진격이다, 이 망할 놈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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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면 안 되는데, 하다 보니 해야 할 이야기가 마구 밀려옵니다.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어쨌든 저희는 결국 도착했습니다. 노용 올이라는, 과거 흉노족의 무덤에요.(이곳은 현재 몽골 고고학회와 정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지만, 저희는 은퇴하신 몽골 고고학자 교수님의 말 한 마디로 프리패스. (사실 여기에도 비하인드가 있습니다만, 궁금하신 분들은 따로 연락 주세요! 회신 드리겠습니다.)
그곳은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닌 무덤들의 무덤입니다.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자신들만의 마지막 장소를 찾아간다고 하죠. 그 광야에서 죽은 이를 매장하기 위해 초원을 가로질러 이곳을 찾아왔을 흉노족을 떠올리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뭔가 뭉클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마 그곳이 무척이나 특별한 장소였겠죠.
저희는 그곳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보이는 건 수십 미터 높이로 자란 자작나무와 곳곳에 도굴이나 발굴로 인해 드러난 무덤들의 황량한 흔적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뭐랄까요, 즐거워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겨울에만 이 무덤들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봄여름가을에는 풀이 너무나 무성해 무덤을 찾기 힘들다고 하네요. 게다가 어떤 무덤들은 땅 밑으로 5, 6미터 혹은 그 이상으로 파내려가기 때문에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눈에 미끄러져 뒹굴고(이날 눈이 몽골에서도 첫눈이었습니다) 숨이 차올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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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용 올 입구로 되돌아온 후 저희는 랜드로버 뒤에 서서 몸을 떨며 보드카와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말 그대로 허겁지겁,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어마어마한 양의 술과 부식들이 순식간에 없어졌습니다. 추위 탓에 보드카를 먹어도 독하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탄산이 과하게 첨가된 음료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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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만 멈춰야겠습니다. 짧게 이야기한다 했는데, 계속 늘어났네요. 그리고 이만 줄여야겠는 진짜 솔직한 이유는 그 시간들을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그때의 정경, 그들의 웃음, 그들과의 대화, 그때의 감정들, 그걸 몇 문장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전 오래전부터 몽골을 상상했습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광대한 초원을, 사방을 둘러봐도 수평선만 보이는 그 대지 위에 꼭 서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선망이 아니라 세계의 극지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북극점이나 아마존과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광막한 대지에 대한.
몽골의 황량함은 폭설에 더해져 제게 잊기 힘든 기억들을 남겨줬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그날 그 길을 함께 걷던 이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눈 덮인 몽골의 대륙이 미지의 세계로부터 오는 아득함을 느끼게 했다면, 그때 그 몇 사람들의 온기는 다시 저를 다정하게 감싸 안아줬습니다. 우리는 서로 출신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생김새도 달랐지만, 그 시간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만으로 서로를 위안할 수 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 여기에 내가 있어, 라고 말하듯 말이죠.
그래서 그 5일 간의 여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곳에서의 모든 순간들이 경이로웠다,
일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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