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간신히 올라탄 전철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데 카톡 알림이 뜬다.
어제 보낸 샘플 원고 피드백 오늘까지 줘요. 필 받았을 때 원고 써야 돼.
얼마 전에 계약한 작가님이다. ‘직장인 책도적’을 밀어내고 ‘편집자 책도적’으로 뇌를 갈아 끼운다. ‘원고가 원고가 아닌데, 이대로는 쓰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면 동기부여가 안 될 테고 이걸 어떻게 돌려 말하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다시 ‘드르륵’ 카톡이 온다.
책도적 집사, 다음 주부터 부흥집회 있는 거 알죠. 월요일 새벽예배 때 대표 기도해야 돼. 이번에 또 빠지면 화낼 거예요. 오늘 아침까지 약속한 기도문 보내고요.
아차, 어젯밤 디아블로4에서 ‘전사 책도적’은 악마를 잡느라 기도문을 까먹었다. ‘집사 책도적’은 아내에게 잡혀 교회 가는 나이롱 신자다. 집에서 생존하려면(이미 쫒겨나기 일보직전이다) 기도문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일단 마감 기한을 늘려보자.
장로님, 제가 요즘 계속 야근이라 힘에 부칩니다. 잘 정리해서 내일까지 드리면 안 될까요?
바로 답이 온다.
책도적 씨, 내일이면 너무 늦어, 오늘 중으로 피드백 줘요. 근데 도적 씨, 교회 다녀요??? 난 교회 안 다녀. 자기 착각했나 봐. 근데 술 그렇게 많이 마시는 기독교인은 처음 봐요.
아차차, 장로님에게 보내야 하는 문자를 작가님께 잘못 보냈다. 이렇게 오늘도 ‘편집자 책도적’은 마이너스 1점을 적립한다.
8시 58분, 출근 시간 2분 전에 사무실에 간신히 도착. 퇴근 전까지는 ‘직장인 책도적’, ‘편집자 책도적’, ‘팀장 책도적’을 오가며 좌충우돌해야 한다. 책 만드는 것이 마감이 정해진 일이라지만, 1년에 5~6권의 책을 마감하고 그만큼의 책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보면 끝이 없는 일이다. 매순간 인격을 갈아끼워가며 원고 사이를 오가는, 마치 저글링하는 기분이다.
이 모든 일은 논리와 설득이라는 나름의 서사로 이뤄진다. 사람을 만나고, 계약을 하고, 피드백을 주고, 들어온 원고를 읽고, 고치고, 쓰고, 스텝들과 소통하고... 이 과정에서 여러 편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그것이 다시 내가 된다. 내 일기장 외에는 기록되진 않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러다보면 보면 나도 모르게(근데 내가 누구지?) ‘인간 책도적’도 성장하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안고 오늘도 그렇게 자리에서 버틴다.
기어코, 퇴근 시간이 됐다. 어제 야근을 했으니, 오늘은 제때 집에 가보기로 한다. 요즘 계속 늦었더니 집에서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다. ‘가장 책도적’은 조금 더 집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전철역으로 가는데 전화가 온다.
도적아. 구라 형 한국 와서 종로에서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와라.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바쁜 척 고마하고.
대학교 친구다. 일본에서 교수로 있는 선배가 잠깐 들어왔나 보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 얼굴 못 본지도 반년이 넘었다. 홍대입구역 1번 출구 앞에서 고민에 빠진다. 2호선(친구들)을 탈 것인가, 경춘선(집)을 탈 것인가. 마침 문자가 온다.
아빠, 몇 시에 와?
경춘선 개찰구를 찍고 들어가며 조심스레 계획을 짜본다.
우선 ‘친구 책도적'은 친구들한테 독감에 걸렸다는 문자를 보낼 것이다. 아웃되지 않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
‘가장 책도적’은 집 앞에서 치킨을 한 마리 살 것이다. 뇌물이 필요한 시점이다.
모두 잠 들고 나면 ‘전사 책도적’은 악마들을 1시간 정도 참교육할 것이다. 스트레스는 풀어야 한다.
이후 ‘집사 책도적’은 어떻게든 기도문을 쓸 것이다. 주님께는 항상 죄송하다. 아참, 잠들기 전에 아침 알람은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으로 바꿔야지.
혼자서 멋진 계획이라고 쓰윽, 웃는데, 갑자기 현타가 온다.
가장, 집사, 전사, 편집자, 직장인 모두 나인데, 왜 모두 내가 아닌 것 같을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아니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은 어디에 있을까?
이 모든 해답은
‘편집자 책도적’이 얼마 전 마감한 따끈따끈한 신작 《나라는 착각》에 담겨있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자아는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한 부분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어붙인 기억의 집합이다. 즉, 내가 나와 세상에 들려주는 ‘나에 대한 편집된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가격은 2만 2천원이다.